지리산 산행기
지리산, 그 빼어난 미모에 반하다! Grade P
여름방학이 반도 더 지나가 버린 8월 우리 가족은 휴가 계획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교수산악회에서 지리산 산행이 준비되어 있다는 생각에 저녁 식사를 하면서 ‘우리 지리산 산행을 해볼까’하고 운을 떼었더니 즉각 반응이 온다. 백두대간의 남쪽 끝자락에 뻗어있는 지리산,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산이니 당연히 그렇겠지. 그러나 차츰 시간이 지나가면서 밀린 공부에 빠지면 안 될 것 같은 학원 수업에 고2짜리 딸애가 빠지겠다고 하더니, 집사람도 냉큼 밥 해줘야 된다는 핑계로 빠지겠단다. 하긴 발걸음 떼는 일이라면 평지도 귀찮은 아내가 등산이라니 처음부터 엉감생심이기는 했다. 결국 초등학교 6학년짜리 아들 녀석 상윤이의 손을 잡고 지리산 정상 정복에 나섰다. 아들과 함께하는 지리산 산행, 이 녀석에게 지리산이 얼마나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까!
8월 13일 금요일 오후 4시, 문화관 앞에 서있는 스쿨버스로 갔더니 교수산악회 김영남씨가 반갑게 맞는다. 한편으론 내 손을 잡고 끌려오는 상윤이 모습을 보며 걱정스러운 듯이 ‘제법 긴 산행인데 괜찮을까요?’ 한다. 작은 체구에 12시간 정도 걸리는 산행 일정을 계획해 놓은 터라 걱정이 되었을게다. 그러나 이 녀석이 누구인가! 지기 싫어하고 힘든 일일수록 더 악착같이 달라붙는 내 피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녀석 아닌가! 이번 산행이 더 재미있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룰루랄라 휘파람을 불게한다.
문화관에서 출발하여 교대를 거쳐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차는 거침없이 달렸다. 간혹 빗방울도 듣는 듯하였다. 태풍이 지나고 폭우가 중부에서 남부 지방으로 내려간다는 일기예보를 들은 터라 조금 걱정은 되었지만 이 역시 지리산 산행에 또 다른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모든 모험은 우리에겐 즐거움이니까. 저녁 8시쯤 전주에 도착하여 ‘고궁’이라는 비빔밥 전문점에서 맛있게 저녁 식사를 했다. 시장기에다 맛깔스런 음식이 보태졌으니 최고의 저녁 식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식사후 장대비가 쏟아져서 버스까지 50미터도 안되는 거리를 이동하는 데 ‘군사작전’이 필요했다. 여러 분들이 우산을 받쳐주는 친절 서비스를 제공한 뒤에야 무사히 탑승을 완료할 수 있었다. 전주에서 지리산 서울대 남부연습림 수련원까지는 1시간 반 가량 걸렸고 도착하자마자 텐트를 설치하고 나니 밤 열시쯤 되었다. 다행히 이곳은 전혀 비가 오지 않았다.
여러 분들이 모였으니 그냥 잠만 잘 수는 없잖아! 서로 간단히 인사하고 파전에 막걸리가 돌아간다. 이번 산행에는 의대, 치의대 교수님들이 많이 참석했다. 대개 나와 비슷한 동기로 산행에 참석하신 것으로 보였다. 지리산 산행이라는 기대감! 더불어 김영민 회장님이 한분 한분께 전화를 돌린 것이 크게 작용한 듯하였다. 대개 술자리가 그렇듯이 간단히 하려던 술자리는 한순배 두순 배 돌아가면서 점점 이야기가 풍성해지고 얼큰해지면서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진다. 난 아이가진 부모가 으레 그렇듯이 상윤이를 보살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12시쯤 은근슬쩍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음날 새벽 다섯 시, 맞춰놓은 얼람에 득달같이 일어나 양치하고 텐트를 걷어내고 아침밥을 먹었다.
오전 여섯시 경 수련장 바로 밑 솔봉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버섯탕이라 했던가, 맛이 부드러워 껄끄러운 아침 식사도 쉽게 넘어갔다. 어젯밤 안주 겸 밤참으로 맛있게 먹었던 부침개도 이 집 솜씨렷다. 식사 후 커피도 마시고, 기지개도 활짝 펴고, 아침 볼일도 보고, 충분히 준비한 뒤 출발한 시각이 대략 6시 40분경이었다. 마침내 안개가 옅게 깔린 지리산 속살 구경을 떠난다. 선봉에 선 등반대장 정영목 교수님과 39명의 교수산악회 가족들이 민족의 영산에 발을 들여 놓는 것이다.
지리산의 어원을 찾아보니 참 다양하기도 하다. 두루뭉실하다는 의미에서 두류산이랬다가 전라도 지방의 구개음화 현상 때문에 두루, 두리, 드리, 디리를 거쳐 지리산이 되었다는 설부터 智慧로운 異人이 많이 계시는 산이라는 의미로 智異山이 되었다는 설까지, 대개의 명산이 그렇듯이 오랜 세월 많은 이들의 입을 거치면서 다양한 해석들이 분분해졌을 것이다. 전체 산행 코스는 직전마을에서 출발하여 피아골을 따라 임걸령에 오르고, 이곳에서 부터는 주능선을 따라 삼도봉, 화개재를 거쳐 뱀사골을 타고 내려가는 코스였다. 예정 산행 시간은 12시간 정도, 제법 긴 코스였다. 날씨는 우려와 달리 구름은 있었으나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았다.
피아골을 따라 오르는 산행은 계곡물을 옆에 끼고 오르는 산행이어서 무척 시원하고 상쾌했다. 큰 비가 내린 뒤끝이라 계곡에서 흐르는 물은 제법 콸콸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20분 간격으로 휴식을 취했는데 간혹 계곡물 옆에서 휴식을 취할 때엔 마치 무더운 한여름 냉장고문을 벌컥 열었을 때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자연 냉풍을 고스란히 만끽한 것이다. 숲 그늘이 주는 포근함, 경쾌하게 흐르는 물소리, 고개만 들면 산수화처럼 펼쳐지는 풍경들, 마치 그윽한 자태를 간직한 미인을 보는 듯하였다. 삼년 전 천왕봉을 오를 때 느꼈던 위엄과는 또 다른 고즈넉한 아름다움이었다. 계곡을 오르면서 고로쇠나무가 우점종이라 가을엔 참 붉게 물들겠다 하였더니 三紅沼라는 연못이 나온다. 피아골에서 정상을 거쳐 내려가는 산행 길인 뱀사골에 이르기까지 가을 단풍은 환상적인 곳이 이곳이란다. 가을에 다시 찾고 싶은 산행길이다.
흐르는 계곡 물소리와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겨 사뿐사뿐 오르다 보니 어느새 임걸령에 도착해 있었다. 배가 출출하다 했더니 시간이 12시에서 조금 빠지는 11시 45분경이었다. 점심은 출발지에서 가지고 온 주먹밥 세 덩어리, 김치와의 궁합이 절묘했다. 교수산악회에서의 점심은 여러 분들이 싸 가지고 온 다양한 음식을 나누어 먹는 즐거움이 있는데 이번 산행은 이틀 산행이라 음식을 싸가지고 오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나름 준비하신 분들이 있어 과일도 내놓고, 커피도 내놓고 등등 교수산악회의 푸짐한 인심을 재확인시킨다.
점심후 12시 반경에 오후 산행을 시작하였다. 본격적으로 주능선을 타는 산행이다. 노루목을 거쳐 삼도봉에 이르니 1시 45분쯤 되었다. 삼도봉에서 단체기념 사진을 찍었다. 출발지부터 사진 찍으실 때마다 ‘이게 마지막 사진이 될지 몰라요’ 하시는 김영진 회장님의 은근한 협박으로 출석부 사진, 혹은 요즘 아이들 말로는 인증샷을 날렸다. 주능선의 마지막 기착지는 화개재, 옛날 삼도의 백성들이 지게지고, 보쌈지고 물건을 날라와서 물물거래를 했던 장소라 한다. 주능선의 경관은 여느 산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다양한 식생들이 산림을 뒤덮은 가운데 군데군데 조릿대 밭과 진달래 군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화개재를 거쳐 뱀사골 내려가는 길을 타기 시작한 게 2시 15분가량이었으니 이미 산행 시작한 지 7시간 반이 넘은 시각이었다. 다들 지쳤을 게 분명한데 내색 한번 하지 않는다. 아마 중간에 낙오하는 오점을 남기지 않으려 함이었을 것이다. 상윤이도 쉽지 않았을 텐데 마냥 즐겁게 따라왔다. 아직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하였다. 오히려 내가 내려가는 길에 쥐가 날려는 신호가 와 잠시 쉬었다 가야했다. 뒤따라오시는 이날의 후위 등반대장 김웅한 교수님이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주셨다.
내려가는 길에는 상윤이도 힘들어했다. 등산화가 아니라 운동화를 신었던 탓에 자갈이 많은 내리막길에 발바닥이 쏠려 따가워진 것이다. 조금씩 쉬면서 천천히 내려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마다 김웅한 교수님이 상윤이를 격려하면서 충분히 쉬게끔 배려해 주셨다. 역시 등반대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 듯하다.
뱀사골 계곡은 최근에 단장을 한 듯 군데군데 나무 계단을 산뜻하게 설치해 놓았고, 계곡 쪽 풍경을 음미할 수 있게 벤치나 가드 등을 적절히 잘 설치해 두었다. 덕분에 뱀사골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을 안전하게 음미할 수 있었다. 내려오는 곳곳에서 발견하는 폭포와 沼(연못)는 정말 아름다웠다. 제승대, 병소, 뱀소, 탁룡소, 오룡소 등등, 지리산의 빼어난 미모를 한껏 뽐내고 있는 곳이 뱀사골이라 하면 과장일까? 넋을 잃을 정도의 아름다움이었다. 어쩌면 적당히 불어난 계곡물 때문에 더없이 아름답게 느껴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의 지리산은 어쩌면 다시 만나기 어려운 지리산이 될 지도 모른다. 가을에 단풍이 붉게 물들 면 지리산이 어떻게 꽃단장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저녁 6시가 넘어서 산행 도착지 만선에 도착했으니 거의 12시간 산행을 한 셈이다. 콘크리트 포장 길로 내려서는 상윤이는 그제서야 긴장이 풀리는 지 “만세! 지리산을 정복했다!” 하고 환호했다. 대견스럽기도 하고 얼마나 커다란 성취감을 느끼고 있을지 마음 한 켠이 뭉클했다. 식당에 도착해서야 이곳 저곳에서 산행이 너무 길다는 불평들이 새어 나온다. 오는 내내 불평 한마디 없으시더니. 이게 아마 단체의 미덕이 아닐까 싶다. 저녁을 비빔밥과 삼겹살, 막걸리로 채우고 산행 중의 즐거웠던 얘기를 되새기면서 긴 산행을 마쳤다. 밤 여덟시 가량 출발한 버스는 다시 교대를 거쳐서 학교로 들어오니 자정이 넘어 있었다. 불 꺼진 캠퍼스를 기대했는데 웬걸 본부도 환히 불을 켜고 있었고 심지어 마을버스도 들어오고 있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지난 이틀 꿈같이 보낸 지리산 산행의 즐거움을 늘 함께 산행하던 벗, 조형택 박사에게 어떻게 전할까 궁리하다 보니 산행기가 완성되었다. 붉게 물든 뱀사골 계곡 꼭 함께 찾아가자, 친구여!
2010년 8월 15일 광복절 날에
여름방학이 반도 더 지나가 버린 8월 우리 가족은 휴가 계획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교수산악회에서 지리산 산행이 준비되어 있다는 생각에 저녁 식사를 하면서 ‘우리 지리산 산행을 해볼까’하고 운을 떼었더니 즉각 반응이 온다. 백두대간의 남쪽 끝자락에 뻗어있는 지리산,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산이니 당연히 그렇겠지. 그러나 차츰 시간이 지나가면서 밀린 공부에 빠지면 안 될 것 같은 학원 수업에 고2짜리 딸애가 빠지겠다고 하더니, 집사람도 냉큼 밥 해줘야 된다는 핑계로 빠지겠단다. 하긴 발걸음 떼는 일이라면 평지도 귀찮은 아내가 등산이라니 처음부터 엉감생심이기는 했다. 결국 초등학교 6학년짜리 아들 녀석 상윤이의 손을 잡고 지리산 정상 정복에 나섰다. 아들과 함께하는 지리산 산행, 이 녀석에게 지리산이 얼마나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까!
8월 13일 금요일 오후 4시, 문화관 앞에 서있는 스쿨버스로 갔더니 교수산악회 김영남씨가 반갑게 맞는다. 한편으론 내 손을 잡고 끌려오는 상윤이 모습을 보며 걱정스러운 듯이 ‘제법 긴 산행인데 괜찮을까요?’ 한다. 작은 체구에 12시간 정도 걸리는 산행 일정을 계획해 놓은 터라 걱정이 되었을게다. 그러나 이 녀석이 누구인가! 지기 싫어하고 힘든 일일수록 더 악착같이 달라붙는 내 피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녀석 아닌가! 이번 산행이 더 재미있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룰루랄라 휘파람을 불게한다.
문화관에서 출발하여 교대를 거쳐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차는 거침없이 달렸다. 간혹 빗방울도 듣는 듯하였다. 태풍이 지나고 폭우가 중부에서 남부 지방으로 내려간다는 일기예보를 들은 터라 조금 걱정은 되었지만 이 역시 지리산 산행에 또 다른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모든 모험은 우리에겐 즐거움이니까. 저녁 8시쯤 전주에 도착하여 ‘고궁’이라는 비빔밥 전문점에서 맛있게 저녁 식사를 했다. 시장기에다 맛깔스런 음식이 보태졌으니 최고의 저녁 식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식사후 장대비가 쏟아져서 버스까지 50미터도 안되는 거리를 이동하는 데 ‘군사작전’이 필요했다. 여러 분들이 우산을 받쳐주는 친절 서비스를 제공한 뒤에야 무사히 탑승을 완료할 수 있었다. 전주에서 지리산 서울대 남부연습림 수련원까지는 1시간 반 가량 걸렸고 도착하자마자 텐트를 설치하고 나니 밤 열시쯤 되었다. 다행히 이곳은 전혀 비가 오지 않았다.
여러 분들이 모였으니 그냥 잠만 잘 수는 없잖아! 서로 간단히 인사하고 파전에 막걸리가 돌아간다. 이번 산행에는 의대, 치의대 교수님들이 많이 참석했다. 대개 나와 비슷한 동기로 산행에 참석하신 것으로 보였다. 지리산 산행이라는 기대감! 더불어 김영민 회장님이 한분 한분께 전화를 돌린 것이 크게 작용한 듯하였다. 대개 술자리가 그렇듯이 간단히 하려던 술자리는 한순배 두순 배 돌아가면서 점점 이야기가 풍성해지고 얼큰해지면서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진다. 난 아이가진 부모가 으레 그렇듯이 상윤이를 보살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12시쯤 은근슬쩍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음날 새벽 다섯 시, 맞춰놓은 얼람에 득달같이 일어나 양치하고 텐트를 걷어내고 아침밥을 먹었다.
오전 여섯시 경 수련장 바로 밑 솔봉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버섯탕이라 했던가, 맛이 부드러워 껄끄러운 아침 식사도 쉽게 넘어갔다. 어젯밤 안주 겸 밤참으로 맛있게 먹었던 부침개도 이 집 솜씨렷다. 식사 후 커피도 마시고, 기지개도 활짝 펴고, 아침 볼일도 보고, 충분히 준비한 뒤 출발한 시각이 대략 6시 40분경이었다. 마침내 안개가 옅게 깔린 지리산 속살 구경을 떠난다. 선봉에 선 등반대장 정영목 교수님과 39명의 교수산악회 가족들이 민족의 영산에 발을 들여 놓는 것이다.
지리산의 어원을 찾아보니 참 다양하기도 하다. 두루뭉실하다는 의미에서 두류산이랬다가 전라도 지방의 구개음화 현상 때문에 두루, 두리, 드리, 디리를 거쳐 지리산이 되었다는 설부터 智慧로운 異人이 많이 계시는 산이라는 의미로 智異山이 되었다는 설까지, 대개의 명산이 그렇듯이 오랜 세월 많은 이들의 입을 거치면서 다양한 해석들이 분분해졌을 것이다. 전체 산행 코스는 직전마을에서 출발하여 피아골을 따라 임걸령에 오르고, 이곳에서 부터는 주능선을 따라 삼도봉, 화개재를 거쳐 뱀사골을 타고 내려가는 코스였다. 예정 산행 시간은 12시간 정도, 제법 긴 코스였다. 날씨는 우려와 달리 구름은 있었으나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았다.
피아골을 따라 오르는 산행은 계곡물을 옆에 끼고 오르는 산행이어서 무척 시원하고 상쾌했다. 큰 비가 내린 뒤끝이라 계곡에서 흐르는 물은 제법 콸콸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20분 간격으로 휴식을 취했는데 간혹 계곡물 옆에서 휴식을 취할 때엔 마치 무더운 한여름 냉장고문을 벌컥 열었을 때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자연 냉풍을 고스란히 만끽한 것이다. 숲 그늘이 주는 포근함, 경쾌하게 흐르는 물소리, 고개만 들면 산수화처럼 펼쳐지는 풍경들, 마치 그윽한 자태를 간직한 미인을 보는 듯하였다. 삼년 전 천왕봉을 오를 때 느꼈던 위엄과는 또 다른 고즈넉한 아름다움이었다. 계곡을 오르면서 고로쇠나무가 우점종이라 가을엔 참 붉게 물들겠다 하였더니 三紅沼라는 연못이 나온다. 피아골에서 정상을 거쳐 내려가는 산행 길인 뱀사골에 이르기까지 가을 단풍은 환상적인 곳이 이곳이란다. 가을에 다시 찾고 싶은 산행길이다.
흐르는 계곡 물소리와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겨 사뿐사뿐 오르다 보니 어느새 임걸령에 도착해 있었다. 배가 출출하다 했더니 시간이 12시에서 조금 빠지는 11시 45분경이었다. 점심은 출발지에서 가지고 온 주먹밥 세 덩어리, 김치와의 궁합이 절묘했다. 교수산악회에서의 점심은 여러 분들이 싸 가지고 온 다양한 음식을 나누어 먹는 즐거움이 있는데 이번 산행은 이틀 산행이라 음식을 싸가지고 오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나름 준비하신 분들이 있어 과일도 내놓고, 커피도 내놓고 등등 교수산악회의 푸짐한 인심을 재확인시킨다.
점심후 12시 반경에 오후 산행을 시작하였다. 본격적으로 주능선을 타는 산행이다. 노루목을 거쳐 삼도봉에 이르니 1시 45분쯤 되었다. 삼도봉에서 단체기념 사진을 찍었다. 출발지부터 사진 찍으실 때마다 ‘이게 마지막 사진이 될지 몰라요’ 하시는 김영진 회장님의 은근한 협박으로 출석부 사진, 혹은 요즘 아이들 말로는 인증샷을 날렸다. 주능선의 마지막 기착지는 화개재, 옛날 삼도의 백성들이 지게지고, 보쌈지고 물건을 날라와서 물물거래를 했던 장소라 한다. 주능선의 경관은 여느 산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다양한 식생들이 산림을 뒤덮은 가운데 군데군데 조릿대 밭과 진달래 군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화개재를 거쳐 뱀사골 내려가는 길을 타기 시작한 게 2시 15분가량이었으니 이미 산행 시작한 지 7시간 반이 넘은 시각이었다. 다들 지쳤을 게 분명한데 내색 한번 하지 않는다. 아마 중간에 낙오하는 오점을 남기지 않으려 함이었을 것이다. 상윤이도 쉽지 않았을 텐데 마냥 즐겁게 따라왔다. 아직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하였다. 오히려 내가 내려가는 길에 쥐가 날려는 신호가 와 잠시 쉬었다 가야했다. 뒤따라오시는 이날의 후위 등반대장 김웅한 교수님이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주셨다.
내려가는 길에는 상윤이도 힘들어했다. 등산화가 아니라 운동화를 신었던 탓에 자갈이 많은 내리막길에 발바닥이 쏠려 따가워진 것이다. 조금씩 쉬면서 천천히 내려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마다 김웅한 교수님이 상윤이를 격려하면서 충분히 쉬게끔 배려해 주셨다. 역시 등반대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 듯하다.
뱀사골 계곡은 최근에 단장을 한 듯 군데군데 나무 계단을 산뜻하게 설치해 놓았고, 계곡 쪽 풍경을 음미할 수 있게 벤치나 가드 등을 적절히 잘 설치해 두었다. 덕분에 뱀사골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을 안전하게 음미할 수 있었다. 내려오는 곳곳에서 발견하는 폭포와 沼(연못)는 정말 아름다웠다. 제승대, 병소, 뱀소, 탁룡소, 오룡소 등등, 지리산의 빼어난 미모를 한껏 뽐내고 있는 곳이 뱀사골이라 하면 과장일까? 넋을 잃을 정도의 아름다움이었다. 어쩌면 적당히 불어난 계곡물 때문에 더없이 아름답게 느껴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의 지리산은 어쩌면 다시 만나기 어려운 지리산이 될 지도 모른다. 가을에 단풍이 붉게 물들 면 지리산이 어떻게 꽃단장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저녁 6시가 넘어서 산행 도착지 만선에 도착했으니 거의 12시간 산행을 한 셈이다. 콘크리트 포장 길로 내려서는 상윤이는 그제서야 긴장이 풀리는 지 “만세! 지리산을 정복했다!” 하고 환호했다. 대견스럽기도 하고 얼마나 커다란 성취감을 느끼고 있을지 마음 한 켠이 뭉클했다. 식당에 도착해서야 이곳 저곳에서 산행이 너무 길다는 불평들이 새어 나온다. 오는 내내 불평 한마디 없으시더니. 이게 아마 단체의 미덕이 아닐까 싶다. 저녁을 비빔밥과 삼겹살, 막걸리로 채우고 산행 중의 즐거웠던 얘기를 되새기면서 긴 산행을 마쳤다. 밤 여덟시 가량 출발한 버스는 다시 교대를 거쳐서 학교로 들어오니 자정이 넘어 있었다. 불 꺼진 캠퍼스를 기대했는데 웬걸 본부도 환히 불을 켜고 있었고 심지어 마을버스도 들어오고 있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지난 이틀 꿈같이 보낸 지리산 산행의 즐거움을 늘 함께 산행하던 벗, 조형택 박사에게 어떻게 전할까 궁리하다 보니 산행기가 완성되었다. 붉게 물든 뱀사골 계곡 꼭 함께 찾아가자, 친구여!
2010년 8월 15일 광복절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