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의 맹목적성
이일하l 2011-05-01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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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의 맹목적성 Grade E
“진화의 수레바퀴를 처음부터 다시 되돌린다면 현존하는 생명체와는 다른 생물종이 지구상에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 말은 하버드 대학의 진화학자였던 스티브 제이 굴드가 ‘Wonderful Life’라는 책에서 던진 화두로 많은 학자들의 생각의 틀을 바꾸게 만든 명언이다. 2000년 초에 만들어진 에볼루션(Evolution)이라는 영화는 이러한 아이디어에 입각하여 진화를 빠른 시간으로 돌렸을 때 나타나는 이상하게 생긴 생물체들을 묘사하고 있다. 왜 지금과 다른 진화적 결과가 나오게 될까? 그에 대한 교과서적 해답이 ‘진화의 맹목적성’이다. 진화에는 어떤 목적이나 방향성이 없다는 것이다.
진화의 원동력은 개체군내에 존재하는 변이와 이 변이들 가운데 특정 형질을 선택하는 자연의 힘이다. 자연선택에 의해 선택되는 형질은 개체의 생존에, 정확히는 ‘더 많이 살아남기’에, 도움이 되는 형질이다. 전문 용어로는 적응도(fitness)를 증가시키는 형질이 맹목적으로 선택되는 것이다. 진화의 불예측성은 돌연변이에 의한 변이의 축적이 무작위적이며, 적응도가 높은 개체가 선택되는 과정이 무작위적인데 기인한다. 그런데 최근 미시건 주립대학의 Rich Lenski 교수가 진화가 맹목적적이며 방향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여 주목된다.
Rich Lenski 교수는 진화의 증거를 눈앞에 펼쳐 보이는 대단한 연구 결과를 발표한 내 마음의 영웅이다. 20년동안 5만세대의 대장균을 연속 배양하면서 진화가 서서히 일어나는 과정을 보여준 대단한 집념의 과학자이다. 이 실험에 매료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리차드 도킨스교수는 그의 최근 저작 ‘지상 최대의 쇼’에서 Lenski 교수의 연구 결과를 아주 상세히 설명하면서 뿌듯해하고 있다. 그런 사람이 진화론자들의 일반화된 대명제 ‘진화의 맹목적성’을 거스르는 결과를 발표했다니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실험 결과는 개체의 적응도(fitness)보다 진화가능성(evolvability)이 진화 방향의 흐름을 결정함을 보여준다. 즉 5만 세대를 걸쳐서 궁극적으로 살아남는 개체-Lenski 교수는 Eventual Winner라고 묘사하고 있다-는 각 세대에서 적응도가 높은 개체가 아니라 진화될 수 있는 잠재력이 높은 개체임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지금 당장 적응도가 떨어져도 변화가 더 잘 일어날 수 있는 개체가 궁극적으로는 진화적으로 선택받는다는 것이다. 이 결과가 진화의 맹목적성에 의해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Lenski 교수는 시간을 거꾸로 돌려 진화를 다시 진행시키는 실험을 수행하였다. Lenski 교수는 모든 세대의 대장균을 모두 냉장고에 얼려두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진화의 수레바퀴를 다시 돌릴 수 있다. 이것이 나를 포함한 많은 생물학자들이 Lenski 교수의 연구를 환장하게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프로젝트 시작 후 500세대 쯤에서 다시 대장균을 꺼집어내어 883 세대가 흘러가게 한 뒤에 결과를 보았더니 역시 진화가능성이 높은 개체가 진화의 최종 승자가 되어 있었다.
Lenski 교수의 실험 결과는 진화에는 방향성이 없다라는 패러다임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반면 우리 일반인들의 상식에는 잘 부합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영화 ‘에볼루션’에서는 진화의 수레바퀴를 다시 돌렸을 때 현존하는 생물종과는 다른 종이 생성되지만 어쨌든 현존 생물종의 진화 궤적을 근사적으로 따르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 인간과 비슷한 유인원이 출현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게 우리들의 일반 상식에도 부합하는 것이 아닐까! 진화에 방향성은 없지만 진화의 본질적인 특성에 의해 흐름은 결정되는 것이다. 생물학에서 배우는 또 하나의 교훈, 아무리 좋은 것도 경직되어 버리면 도태된다는 것, 변화의 흐름에 몸을 내맡기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그래서 보수의 가치를 인정하는게 싶지 않다.
Reference
Second order selection for evolvability in a large E. coli population. Science (2011) 331; 1433-1435.
2011년 5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