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르크의 대반전
획득형질의 유전, 유전학의 금기어, 그리고 대반전.... Grade E
라이센코주의(Lysenkoism)는 생물학자들에게, 특히 유전학자들에겐 비과학적, 정치적 프로퍼겐더로서 경멸의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라이센코는 1930년대에서 1960년대 사이에 구소련의 생물학을 끌고 갔던 중심인물로 소련의 농업을 파탄에 이르게 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라이센코가 한 일은 자연과학이 정치에 활용되었을 때 어떤 파국을 맞게 되는 지 보여주는 전형이다.
라이센코주의는 한마디로 얘기하면 ‘라마르크의 획득형질의 유전’을 학술적으로 뒷받침하려는 일련의 과학자들에 의한 스탈린식 공산주의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즉 ‘다윈의 자연선택’에 대한 대립각으로서 진화의 동력을 생물체가 특정 형질을 획득하려는 노력에서 찾는 유사과학(pseudo-science)이다. 중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는 높은 나무에 달려있는 잎을 따먹기 위해 목을 늘리는 과정에서 기린이 목이 길어졌다는 설명이 획득형질의 전형이며 라이센코주의에서 입증하고 싶었던 이론이다. 대표적인 실험 예로서 옥수수에 비료와 설탕을 같이 뿌려주고 재배하면 다음 세대에서는 설탕을 주지 않아도 당도가 높은 옥수수를 수확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습지만 이 내용이 멀쩡한 과학저널에 버젓이 실릴 수 있었던 것은 스탈린주의를 과학적으로 입증한다는 라이센코의 독선과 전횡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중을 집중적으로 교육하고 교화함으로써 더 바람직한 형질이 다음 세대로 전달되게 한다는 스탈린식 교조주의를 뒷받침하려 했던 것이다. 이후 소련의 농업 기술이 붕괴된 것은 불문가지이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반대로 우생학(eugenics)이 판을 치고 있었다. 우생학은 인간의 품성과 자질이 환경적인 요인보다는 유전적인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론이다. 우생학의 정치적 프로퍼겐더를 활용한 사람은 잘 알려진 대로 히틀러이다. 그는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과 순수성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강변하면서 특히 유대인의 씨를 말리는 홀로코스터를 통해 혈통이 불순해질 우려를 사전에 봉쇄하고자 했다. 나치 독일만 우생학에 경도되었던 것은 아니고 미국에서도 우생학을 통해 우수한 혈통을 신대륙에 뿌리내리고자 시도한 바 있다. 우리나라의 민속촌 쯤 되는 마을에 표준형, 혹은 우생학적으로 우수한 혈통을 가진 가족들을 살게 하면서 전시하기도 하였고, 유전적으로 불량한 사람들을 합법적으로 거세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우생학 또한 지금은 터무니없는 일로 여겨진다.
최근 환경을 통해 얻어진 형질이 다음 세대로 유전된다는 여러 가지 근거들이 등장하기 시작해서 흥미를 끌고 있다. 첫 번째 흥미로운 발표는 식물에서 보고된 'hothead'라는 돌연변이체가 멘델의 유전법칙을 깨고 염색체 유전과는 상관없는 유전현상을 보인다는 내용이었다(1). 저명한 과학저널 Nature에 2005년 발표된 이 논문은 염색체상의 유전자가 아닌 어떤 존재가 유전현상에 관여함을 보인 것으로, Nature는 그 어떤 존재를 요즘 유행하는 miRNA가 아닐까 추측하는 기사도 같은 호에 실음으로써 신빙성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논문은 잘못된 실험에 근거한 오류임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어 해프닝으로 끝날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어쨌든 이 발표는 학계에 환경에서 얻어진 형질도 유전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들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들었다.
이후 2006년 환경으로부터 얻어진 형질, 즉 획득형질이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는 논문이 역시 Nature 지에 발표되게 된다(2). 제목도 그럴싸해서 'transgenerational memory'라는 이름으로 획득형질의 유전을 기술하고 있다. 실험은 상당히 간단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환경스트레스로서 자외선과 식물방어물질(flagellin)을 처리한 후 유전적 변형을 관찰하고 이것이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현상을 기술하고 있다. 환경에 의한 획득형질이 유전됨을 명쾌하게 보인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이후 연구자들에 의해 그렇다, 아니다 논쟁이 뜨겁게 달구어지고 있는 상황이다(3, 4). 현재 필자의 견해를 구한다면 잘 모르겠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이다. 진화는 어쨌든 유전적 변이, 즉 변화를 필요로 하며 이 과정에 환경에서 유래된 변화가 다음 세대로 전달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또 하나 재미있는 학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실은 이 글의 서두를 장황하게 끌어온 것도 이 새로운 학문 흐름을 소개하기 위함이다. 행동생태학은 이화여대 석좌교수인 최재천교수에 의해 국내에 널리 알려진 학문이다. 누구나 동물의 행동에 대해 왜 그런 짓을 할까 한번쯤 궁금해 했을 것이며, 그에 대한 해답을 찾는 학문인 행동생태학은 당연히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거기에 최재천 교수의 구수한 입담이 보태졌으니 어찌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지 않을까? 행동생태학의 연구를 통해 이미 선험적으로 우리 인류가 잘 알고 있던 지극히 당연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엄마의 애정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은 후에 성인이 되었을 때 애정을 받고 자란 아이들보다 훨씬 문제아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혹시 어린 시절의 가혹한 추억이 우리 유전자에 새겨지는 것은 아닐까?
최근 이를 에피유전학적 메커니즘(기작)으로 설명하려는 과학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에피유전학이란 유전자의 본체인 DNA의 염기서열을 변화하지 않고도 발현된 특정 형질이 유전되는 현상을 말하는데, 대개는 염기서열은 바뀌지 않고 염기에 화학적 변화(메틸화가 좋은 예이다)만을 일으켜서 유전자 발현을 조절한다. 엄마의 지극한 애정, 즉 머리를 쓰다듬는 행위, 등을 두드리는 행위 등이 유전자의 염기서열을 바꾸지는 않지만 염기에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줌으로써 성인이 되었을 때 보다 온순하며, 훌륭한 인물이 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런 방식으로 동물의 여러 가지 행동을 에피유전학적 기작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에 대해 정통 유전학자들은 상당한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 라이센코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필자는 직관적으로 경험과 에피유전학 사이에 일정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 모든 유년 시절의 경험이 우리의 무의식 어딘가에 묻혀있다는 심리학적 분석보다 오히려 더 타당해 보이기 때문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에피유전학적 현상은 다음 세대로 유전될 수 있는 현상임을 생각하면 환경에서 얻어진 형질의 유전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획득형질의 유전’에 대반전이 일어날까?
2010. 9. 23.
Reference
1. Lolle et al.,(2005) 505-509. 2005년 3월 24일자
2. Molinier et al. (2006) Transgeneration memory of stress in plants. Nature 442; 1046-1049. 2006년 8월 6일자
3. Pecinka et al. (2009) Transgenerational stress memory is not a general response in Arabidopsis. PloS ONE 4; e5202.
4. Boyko et al. (2010) Transgenerational adaptation of Arabidopsis to stress requires DNA methylation and the function of Dicer-like proteins. PloS ONE 5; e9514.
5. Buchen (2010) In the nurture. Nature, News Feature, p146-148.